눈오는 날엔 - 서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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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와서 그런지 수년전 서정윤님의 시집을 읽고 기억하고 있던
시들이 어렴풋하게 떠올라 찾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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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오는 날에
아이들이 지나간 운동장에 서면
나뭇가지에 얹히지도 못한 눈들이
더러는 다시 하늘로 가고
더러는 내 발에 밟히고 있다.
 
날리는 눈에 기대를 걸어보아도, 결국
어디에선가 한 방울 눈물로서
누군가의 가슴에
인생의 허점을 심어주겠지만
우리들이 우리들의 외로움을
불편해할 쯤이면
멀리서 반가운 친구라도 왔으면 좋겠다.
 
날개라도, 눈처럼 연약한
날개라도 가지고 태어났었다면
우연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만남을 위해
녹아지며 날아보리라만
누군가의 머리속에 남는다는 것
오래오래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것조차
한갓 인간의 욕심이었다는 것을
눈물로 알게 되리라.
 
어디 다른 길이 보일지라도
스스로의 표정을 고집함은
그리 오래지 않을 나의 삶을
보다 '나'답게 살고 싶음이고
마지막에 한번쯤 돌아보고 싶음이다.
 
내가 용납할 수 없는 그 누구도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아갈 것이고
나에게 '나' 이상을 요구하는
사람이 부담스러운 것만큼
그도 나를 아쉬워할 것이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 않으며 살아야 하고
분노하여야 할 곳에서는
눈물로 흥분하여야겠지만
나조차 용서할 수 없는 알량한
양면성이 더욱 비참해진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나' 조차
허상일 수 있고
눈물로 녹아 없어질 수 있는
진실일 수 있다.
 
누구나 쓰고 있는 자신의 탈을
깨뜨릴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서서히 깨달아 갈 즈음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볼 뿐이다.
 
하늘 가득 흩어지는 얼굴.
눈이 내리면 만나보리라.
 
마지막을 조용히 보낼 수 있는 용기와
웃으며 이길 수 있는 가슴 아픔을
품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으리라, 눈오는 날엔.
 
헤어짐도 만남처럼 가상이라면
내 속의 그 누구라도 불러보고 싶다.
 
눈이 내리면 만나보리라
 
눈이 그치면,
눈이 그치면 만나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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