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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6.29 피천득 '인연' 중에서

피천득 '인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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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유원한 영겁을 느끼게하는 "비원의 가을"의 절구.

'위대한 사람은 시간을 창조해 나가고 범상한 사람은 시간에 실려간다. 그러나 한가한 사람이란 시간과 마주 서 있어 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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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범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달이 태양의 빛을 받아 비치듯,

이탈리아의 플로렌스가 아테네의 문화를 받아 빛났듯이,

남의 광영을 힘입어 영광을 맛보는 것을 반사적 광영이라고 한다.

사람은 저 잘난 맛에 산다지만,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 잘난 맛에 사는 것이다.

이 반사적 광영이 없다면 사는 기쁨은 절반이나 감소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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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주변이 없어' 하는 말은 '나는 무식한 사람이다. 둔한 사람이다' 하는 소리다.

화제의 빈곤은 지식의 빈곤, 경험의 빈곤, 감정의 빈곤을 의미하는 것이요,

말솜씨가 없다는 것은 그 원인이 불투명한 사고 방식에 있다.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후진 국가가 아니고는 사회적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진부한 어구, 모호한 수식어, 패러그래프 하나 구성할 수 없는 지도자!

그렇지 않으면 수도에서 물이 쏟아지듯이 말이 연달아 나오지마는,

그 내용이야말로 수도물같이 무미할 때 정말 정나미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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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라는 격언이 있다. 그러나 침묵은 말의 준비 기간이요,

쉬는 기간이요, 바보들이 체면을 유지하는 기간이다. 좋은 말을 하기에는 침묵을 필요로 한다.

때로는 긴 침묵을 필요로 한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아니요,

농도 진한 말을 아껴서 한다는 말이다. 말은 은같이 명료할 수도 있고 알루미늄같이 가벼울 수도 있다.

침묵은 금같이 참을성 있을 수도 있고 납같이 무겁고 구리같이 답답하기도 하다.

그러나 금강석 같은 말은 있어도 그렇게 찬란한 침묵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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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 다리 저는 당나귀를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 그림이 있다.

만나서 즐거운 것은 청담이리라. 말없니 나가서 술을 받아 오는 그 집 부인을 상상한들 어떠리.

 지금 여성들은 대개는 첫번 만날 때 있는 말을 다 털어놓는다. 남의 말을 정성껏 듣는 것도 말을 잘하는 방법인데,

남이 말할 새 없이 자기 말만 하여서 얼마 되지 아니하는 바닥이 더 빨리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만날 때는 예전에 한 이야기를 되풀이하기 시작한다.

아름답게 생긴 여성이 이야기를 시작한 지 삼 분이 못되어 싫증이 나는 수가 있다.

얼굴은 그저 수수하되 말을 할 줄 아는 여인이 좋다.

내가 한 말을 멋있게 받아넘기는 그러한 여성이라면 얼굴이 좀 빠져도 사귈 맛이 있을 것이다.

 나는 거짓말을 싫어한다. 그러나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약간 하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정직을 위한 정직은 필요로 하지 아니한다. 영국에서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는 거짓말을 하얀 거짓말이라고 하고, 죄있는

거짓말을 까만 거짓말이라고 한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기 위하여 하는 거짓말은 칠색이 영롱한 무지갯빛 거짓말일 것이다.

 이야기를 하노라면 자연히 남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남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요,

이해관계 없이 남의 험담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다. 이런 재미도 없이 어떻게 답답한 이 세상을 살아간단 말인가.

우리는 이야기를 하고 산다. 그리고 모든 경험은 이야기로 되어버린다. 아무리 슬픈 현실도 아픈 고생도 애끊는 이별도

남에게는 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 당사자들에게도 한낱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날의 일기도 전기도 치열했던 전쟁도 유구한 역사도 이야기에 지나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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